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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1 10:294 min read

나는 주체적으로 살고 있는 걸까?

요새 김정운 작가의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를 읽고 있는데 한 단락이 중요하게 다가와서 읽다말고 전부터 생각하던 걸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항상 고민이 된다. 지금 내가 진짜 원해서 이러고 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타율성이 한톨이라도 섞여 남의 기준에 조금이라도 맞추기 위해 이러고 있는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때가 있다. 적어도 우린 사회에 살고 있으니 타인의 영향 아래 있는 것은 그렇다 치지만 내가 원한다고 생각해왔던 것이, 사실은 부모님과 주변 사람들이 원했던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엔 그렇게 무서울 수 없었다. 그래서 병적으로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자주 갖고 메타인지를 발휘해보려 발버둥친다. 그러다 읽던 책에서 이 문제의 핵심을 찌르는 문장이 나와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아래가 그 단락이다.

월급쟁이 생활을 때려치우기만 하면 바로 내 삶의 주인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면 정말 큰 착각이다. 평생 추구해야 할 공부의 목표가 없음을 돈의 문제로 환원시키며 자신의 쫓기는 삶을 정당화하는 것 또한 참으로 비겁하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놓치지 않을 관심의 대상과 목표가 있어야 주체적 삶이다. 우리가 젊어서 했던 '남의 돈 따먹기 위한 공부'는 진짜 공부가 아니다.

- 김정운의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 중에서 -

약 7년전, 처음 철학 공부를 시작했을 때 다행히 내가 처음 그렸던 평생동안 할 공부의 밑그림은 나의 죽음을 기준으로 작성되었다. 보통 앞으로 무얼 하며 살아야할지 고민한다거나 1년 혹은 길어야 3년짜리 계획을 세울때의 기준은 '지금'이다. 그래서 하고자 했던 일이 끝나고 세운 계획의 막바지에 이르면 항상 다음의 목표는 상실된다. 그때가서 또 다음에 무얼할지 생각하게 된다. 세운 계획은 딱 그 기간만큼을 상정해놓고 만들었기 때문이다. 10년짜리 혹은 더 긴 계획을 세워도 그 기간이 끝나면 다음에 무얼할지 모르는 것은 매한가지다.

고맙고 재밌는 것은, 철학적 사유는 내가 계획을 만들거나 계획을 만드는 행위를 하기 전에 그것에 대해서 추상적 사고를 하게 만들어준다. 다른 말로는 메타인지를 갖게 해준다. 그래서 그 계획이 왜 내게 필요하고, 그게 내 인생과 정체성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이 끝났을 때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다음엔 무엇을 해야할지에 대해서 파악하게끔 만든다. 이렇게 '지금'의 기준말고 보다 '전체'의 기준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다보면 한가지 사실에 다가가게 된다. 그것은 인생에 관한 모든 계획은(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죽음을 기준으로 세워져야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럴까? 앞서 말했듯이 지금을 기준으로 계획을 세우면 그것이 달성되었을 때 필연적으로 다음의 것에 대해 생각해야만 한다. 그거 안세우면 '방황' 혹은 '휴식'이다. 그런데 죽음의 순간에 내가 어떤 존재로 기억되고 싶은지, 세상에 어떤 기여를 한 사람으로 남고 싶은지, 가족과 친구,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이고 싶은지, 궁극적으로 어떤 종류의 즐거움을 추구하고 싶은지 등, 마지막 상(image)에 대해 정의를 해놓으면 폭포수처럼 거꾸로 거슬러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해놓으면 하나의 계획 혹은 목표를 달성했을 때 다음 목표를 걱정하거나 세우기 위해 방황하지 않아도 된다.

위에서 언급한 것을 예로 들면, 가족과 친구,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지를 정의하는 것은 나의 인간적인 면에 대해 정의하는 것이다. 그 '어떤'이 되기 위해 오늘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해야할지 벌써 대충의 밑그림이 그려지고 이것을 바탕으로 짧고 긴 '인간적 면모에 관한' 계획을 세울 수 있다. 이 계획들의 중간중간에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을 읽는 것이 포함될 수도 있고 오늘 당장 친구에게 어떻게 대하고 어떤 감정과 마음을 전달할지에 대해서도 미리 생각해볼 수 있다.

또 다른 예로, 세상에 작더라도 어떤 기여를 한 사람으로 남고싶은지에 대해 정의한다면 그것은 아마 나의 커리어에 관해 정의하는 일일 것이다. 나의 경우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정의)은 '대단하진 않더라도 사람들이 재미를 느끼거나 기존에 불편했던 것들을 편리하게 만들고자 노력했던 사람으로 남는 것'이다. 그래서 이 인생 전체에 걸친 목표에 다다르기 위한 수단으로서 프로그래밍이라는 것을 택했다. 이걸 세운 것이 2013년이고 3년 반이 지난 지금도 이걸 재밌고 제대로 해보기 위해서 혼자 공부하거나 프로젝트 팀을 만들거나 퇴사하고 새 회사로 옮기는 등 여러 방면으로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지금껏 열몇개의 계획들이 있었지만 한번도 방황하게 된 경우는 없었다. 물론 인생 굴곡의 높낮이, 즉 원하는 것을 얻고 못얻고의 차이는 존재했지만 그 방향성 자체에는 틀어짐이 없었다.

이처럼 인생을 살고, 이에 대해 계획하는 것의 본질에는 마지막에 대해 정의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한가지 중요한 것은 이 죽음을 기준으로 한 마지막 상은 추상적이어야 하고 추상적일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200억 정도의 재산을 가진 부자로 살다가고 싶다라고 마지막을 정의하면 필연적으로 그걸 계획한 현재에는 그 수치에 따라 움직이게 되고 부서지기도 쉽다. 가령, 지금 스무살인데 70년뒤쯤 죽을 것 같으니 200억을 그 나이에 맞춰 나눠 계산하면 현재 얼마를 벌어야하는지에 대해 나오게 되는데 그것이 타산에 맞지 않으면 불가피하게 계획을 수정해야만 한다. 그리고 삶은 불확실성의 연속이므로 자신이 70년뒤에 죽을지, 내일 죽을지 알 길이 없어 계획은 무너지기 쉽다. 그러나 추상적으로 세운다면 그 계획은 그걸 이루기 위한 수 많은 구체적인 하위 계획으로 구성될 수 있고, 중간중간 어떤 일이 일어나는 등의 이변이 생기더라도 쉽게 유기적으로 하위 계획들을 조정해 마지막 추상적인 계획을 유지할 수 있다.

다시 맨 위의 김정운 작가의 글로 돌아와, 이 부분을 읽으며 위의 생각들이 떠올랐다. 마지막에 대해 생각하지 못한 사람들은 현재에 함몰되어 살기 때문에 현재 자신의 삶이 이렇게 된데에 대한 원인 파악을 하기 어렵고 더 나은 상태로 도약하기 위한 next move를 꾀하기도 어렵다. 비유하자면 근시안적이라고 할 수 있고 그런 시야를 갖고 있기에 현실에서 도피해도 주체적 삶을 살기가 어렵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놓치지 않을 관심의 대상과 목표가 있어야 주체적 삶이라는 대목은 그래서 매우 공감하는 바이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공부가 근시안적인 목표를 위해 하는 것이 아닌, 마지막 상에 정의된 공부와 일치할 때, 내가 지금 다른 이들을 생각하고 대하는 방식이 매 순간의 감정과 생각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 아닌, 마지막 상에 정의된 내가 원하는 나의 인간적인 면모와 궤를 같이 할 때 비로소 그것이 진짜 주체적 삶일 것이고 evanescent한 우리네 삶이 끝날 때 마지막 날숨을 내뱉으며 '좋은 삶이었다'라고 말하며 삶을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글을 마친다.

    2017

Written at Cafe Knock,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동백동 평촌2로1번길 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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